<책>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 - 박완서

2008. 12. 12. 17:05Book Reviews

명애의 닥달에 못이겨 찾아간 강북 서쪽 구석에 있는,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는 여고 동창생의 집.
꼬부라진 길 사이를 어렵게 찾아가면서,
아직도 이런 동네가 서울에 있었나 싶었다.

그 친구의 아들은 우리 창석이처럼 죽은것도 아니요,
뺑소니에 치여 척추를 다쳤다 싶다.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왔다지만,
누워있는 기골을 봐선 장대한 사내아이였으리라.
푸석푸석한 살찐 몸뚱이에 흐리멍텅한 눈.
간간히 입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신음소리.

아들을 돌보는 동창애는 우리와 동기이면서도 늙은노파가 다 되어버렸다.
우리가 마치 자기 아들과 자기의 처지를 동정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본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그런 눈 빛에 이제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었던 것인지,
우리가 왔다는 건 아랑곳 하지 않고,
그 큰 아들을 이불에 싸서 앞으로 뒤로 둘려댔다.
욕창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에도 수 번을 한다나?

그러면서도 너때문에 못산다, 얼른 뒈져버려라하며 자기 아들에게 욕을 해댄다.
명애와 나는 가만히 있기 멋적어서 손을 거들려고 했다.
그 때, 아들의 흐리멍텅한 눈 빛은 야수의 그것처럼 번뜩이더니 소리를 질러댄다.
쟤 어미 말고는 다른 사람의 손을 거부하는 그 짓거리가 우리뿐만은 아니였던지,
동기애는, 오냐, 네가 이럴 때 효도하는 구나, 애미 아니면 손도 못가게 잘 한다고 빈정댄다.

나는 눈물을 쏟아냈다.
제 명에 죽지 못했음에도 국민의 열사로 추대되었던 우리 창석이보다
이생에서 저렇게 애미의 손길이라도 갈 수 있게 해주는 동기의 아들이 더 부러웠다.
동기들이 창석이의 죽음으로 자기네 아들 결혼식에 부르지 않았던 것에
아무렇지 않게 쫓아 다녀오면서도 부러운줄 몰랐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 앞에서 누구보다 서럽게 눈물을 쏟아내는 나를 보며,
여고동창 동기애는 자기에게 보이는
동정의 눈물인줄 알았을게다. 그렇게 대성통곡을 통해

 '기를 쓰고 꾸민 자신으로부터 비로소 놓여난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작품의 화자의 1인칭 시점,
자신의 동서형님에게 전화통화로 늘어놓는 말을 일부 각색해 보았다.
작품을 읽고 내 머리 속에 기억나는 대로,
가능한 작품의 내용을 담아보려했다.

짧은 단편을 읽으면서도 내 머리속을 각인 시키는 그 말. '놓여지다.'
자기 컴플렉스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진다는 작가 표현.

이 작품 이외의 몇몇 작품에서도 '놓여지다'라는 표현이 있었고,
이 표현을 접할 때마다 나도 아닌 스스로에게 놓여지지 않는 내 모습을 질책하곤 했다.
그리고 조금씩 '놓여지게'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놓여지자. 스스로 옭아매지 말고, 자연스럽게 나로서 살아가자.

 

'나의 가장 나종 지닌 것'은

박완서씨의 단편집 '가는비, 이슬비'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