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기억과 사고의 의존성

2012. 8. 24. 23:05Communication

샤워를 하면서

어떻게 해야 글쓰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다.

(전선 접속이 불량인지

이따금 불이 꺼져서

자연스레 샤워하면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예이츠나 뭐 그런 문학가들의 글들을 인용하거나,

월가의 경제동향 분석 리포트 등을 언급하며 

어려운 낱말에 이상한 조사를 곁들여가며

혼란스럽게 글을 쓰는게 잘 쓰는 것일까?


사색이나 고민의 내용을 IT 서비스들에 실어나르려는 시도가

어쩌면 귀한 재료로 정성스레 만든 음식을

화학약품으로 잔뜩 처리한 나무젓가락으로

집어먹이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니체는 병약한 유년과

군복무 중 얻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34살에 바젤 대학교에서 사임해야했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 제노바의 한 다락을 빌렸지만,

이전처럼 저술 하기란 쉽지 않았다.

나빠진 시력에 책상의 한 곳에 시력을 고정하면

심한 편두통에 시달려,

건강이 호전됐음에도

깊은 사색이 글쓰기로 이어지기까지는 아직 무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첨단 기술이였던

타자기(덴마크제 몰링 한센 타자기)를 주문하면서,
타자기 사용에 익숙해지자

눈을 감은 채 손가락 끝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었다.


<Hans Rasmus Johann Malling-Hansen Type Writer>


니체의 사례를 보면,

기술은 인간이 맞부딪히는 장애를 극복하거나

사고를 기록하는데 요긴하게 활용된다.

(직장인들이라면

액셀에 대한 낯설음에서 예찬으로 이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마냥 기술이

이른바 '사고', '글쓰기'에 긍정적일까?



기술을 통해 글쓰기는 네트워크를 따라

신속하게 외부로 전달되거나 확산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소위 '스마트'한 세상을 만들려는 각고의 노력으로

인간의 기억 많은 부분을 칩(Chip)의 집적도에 의존하게 되었고,

그 의존적 기억의 집적도가 높아짐에 찬사를 늘어놓는다.

(황의 법칙, 삼성전자의 황창규 사장의 성까지 따가며)



그 의존성은 이제 기억(저장)의 영역에서

사고의 연결에 까지 확대되어가는 것 같다.


사고의 길이와 깊이는

과거보다 짧아지고 얕아져간다.

누군가의 생각이

누구나의 생각과 아이디어로 확산되기까지 

네트워크에선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게 됐다.


'공유'라는 가치는 좋지만,

얕은 사고의 범람(공유)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Like를 누르기는 쉽지만,

상대방의 생각을 옮긴 글을 읽고,

내 의견을 개진해 나가기란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린 쉬운 것을 더 자주 선택하고,

어려운 것을 더욱 멀리하려 한다.


고등학교 3년간 기숙사 구석에 방석을 깔고

10분. 때로는 2~30분씩 명상에 빠졌었던 노력이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사고에 대한 노력조차 쉽지 않다. 


'Like'를 누르는 것보다,

'Like'를 느끼는 그 공감의 과정들을

세심하게 살피고 내 안에 담아둬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