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4. 13. 18:37ㆍBook Reviews
그가 우리 방에 들어와 풀어놓은 것은 우선 아이들 먹으라고 월병이 한 상자였고 뒤이어 우리집 식구들을 위하여 입쌀 한 자루에 옷수숫가루 세 포대와 기름 두 통에 밀가루도 있었다. 우리는 누가 권하기도 전에 상자를 뜯고 비닐포장을 헤쳐 월병을 양손에 두 개씩 움켜쥐고 아구아구 먹었다. 다디단 속 고물에 혀가 녹는 것 같았다. 내가 나중에 런던 와서 오븐에서 갓 구워낸 파이를 베어물다가 세상에 그때의 그 월병과 같은 음식은 다시는 먹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비애를 그리는 할레드 호세이니의 장편소설 '연을 쫒는 아이'나 '천개의 찬란한 태양'처럼 소설은 밝은 이야기보다 힘겹고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는 끊질긴 생명력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마음 속에 짖은 감성을 불러일으킬 때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어제 저녁 침대 맡에서부터 펼치기 시작한 황석영씨의 '바리데기'는 생각지도 않은 1980년대 말부터의 북한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도서관 구석에 앉아 인터넷 페이지를 뒤적이다가, 문득 어제 읽다만 책갈피를 빼들었다. 1장도 다 못 읽고서 피곤해서 시큼해진 눈을 감았던지 앞부분의 이야기는 그저 바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정도밖에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렇게 2장을 넘기고 3장을 넘기다 위의 월병 이야기를 읽는 순간 두 눈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사실 바리의 가족이 남하한 외삼촌 덕에 뿔뿔이 흩어진다는 직접적인 서술이 이 앞부분에 있었으니, 바리는 그렇게 그 머나먼 영국으로 흘러들어가게 되는구나.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 이후에 펼쳐질 바리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의 마리암을 떠올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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