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주의? 궁극엔 자기 위안.

2012. 12. 5. 17:45Diary

주변에 소위 '배푸는 삶'에서 만족을 느끼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에 비해 나는 배풀 물질적,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다.

누구해 비한다는 거 자체가 누구와 비교한다는 건데,

실상 '자원활동'을 하면서 '누구보다' 나아지기 위해 활동을 했던 기억은 없다.


'봉사'라는 말에서, 또 다른 의미로 허세의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봉사의 주체는 행위의 주체이지만, 그 대상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나의 여유'를 너에게 이전하는 일련의 행동으로 '시혜적인' 자세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봉사'를 누군가에게 주는 진정한 선물로 생각한다면,

그 선물 이후의 기대는 이제 상대방의 몫이 아닌가 싶다.

그 선물에 대해 내가 갖는 가장 고귀한 마음은,

선물의 (물질적 또는 정신적) 답례보다

그 선물에 담긴 내 마음, 염려가 상대방에 다가갔으면 하는 그런 자기 위안이 아닐까?


내가 선물을 주면서,

내가 선물을 받으면서,

오롯이 그 선물이 소비(!)되었으면 하는 준비한 자의 바람이 있다.

다른 한편으론 그 선물을 가장 가치롭게 쓰면서 만족할 수 있는 상황이야말로,

선물에 담길 수 있는 진심이 아닌가 싶다.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물건에 의미를 부여하고, 불편함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거야말로,

내가 견디기 힘든 일상의 장애이다.

단지 '준다', '봉사한다.', '배푼다.'는 표면적인 상황만으로

스스로를 이타적이라고 하지만, 실상 행위의 대상의 입장에서는 불편함이 가중되는 상황이 있다는거다.

어쩌면 그런 사후관리를 잘 못하는 성격인지라, 무언가를 받는다는게 나에겐 익숙지 않고,

마음 속 한켠에 빚이 쌓인것 같은 찜찜함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렇쿵, 저렇쿵. 횡설수설했지만,

나는 나의 행동이 시혜적이지 않았으면 싶다.

내가 좀 더 나은걸로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다면,

나는 그에게 가치로운 사람인거고, 

그 관계에서 나는 내가 잃어버렸던 관계의 상대적 위치(예를 들어 가족 구성원의 입지)를

새로운 관계로 복원해내는 셈이니까.

다른 사람에게 비춰지는 나의 '이타주의'는 사실 매우 강한 '이기주의'랄까?


밖은 소복히 눈이 쌓이고 있다.

차갑고 습한 바람이, 여민 옷 사이를 치고 들어오던 엊그제 날씨와는 또 다른,

내리는 눈 소리가 들릴것 같은 그런 서정적인 날인데,

난 내 자릴 잃어가고 있는거 같아 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