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역사의 역사', 품평에 꼬리표를 달다

2019. 5. 9. 14:13Book Reviews

이븐 할둔의 성사에 대해서.

15세기 이슬람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은 
그의 저서 ‘역사서설’ 곳곳에 종교적 찬사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알라의 이름으로…’ 
권력에 침착한 가장 강력한 종교적 해석이 시대를 억압하던 시절, 
해석으로 밥벌이하던 학자들에게는 
오늘날의 사상검증 같은 잣대가 드리워졌을까? 
이런 찬사가 없었다면, 
이단으로 몰려 신변의 안전까지 위협받았을 거라며. 

‘역사의 역사’를 저술한 유시민은
이븐 할둔이 역사서설 속에 찬사를 채운 것에 대해
위와 같이 이야기했다.
그런 당시(어쩌면 현재까지)의 상황을 짚어낸다.

오늘날까지도 ‘해석’이 사상의 잣대로 재단된다. 
품평의 자유, 그 고유함을 침해하는 그런 행태가, 
그 때는 종교가 법 위에 있던 
중세적 맥락이 있었으니 그렇다치지만, 
오늘날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으니

얼마나 후진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공산당 선언]은 왕와 왕조, 국가, 민족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에 대한 인식을,
사회 계급제. 사회 구성원 간의 갈등과 투쟁의 결과로 봤다는 측면에서,
그 이전의 역사학자, 역사가들이 들여다 보지 않은 계층, 계급을 역사의 무대로 끌어당겼다.
끌어 올렸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이 마르크스가 역사가가 아님에도
역사가들이 마르크스를 언급하지 않고 근대 역사를 기술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르크스의 이론은,
경제와 밀접한 주제임에도 역사 해석의 관점, 지평을 넓혔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역사의 종언을 이야기한 마르크스와 프란시스 후쿠야마.

칼 마르크스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적 귀결점, 종말에 대해 언급했다.
물론 그 둘이 정의한 역사적 종말의 상태와 상황은 비슷하지만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그 둘이 제시하는 '역사'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은 유사하다.
-인간은 일관된 방향을 가진 역사를 구축할 것인가?
-그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그 외에도 이 책은

조선말, 일제 강점기를 거친 유학 중심의 역사학자 박은식.
같은 시기에 궁핍해진 역사 인식에 대한 비판을 던진 신채호를 빌어

시대가 역사가에게 관점을 부여주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문명'을 역사연구 단위로 삼은 역사가들.

편에서는,

과학의 발전으로 과학과 역사가 전면적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인류 전체가 역사 서술의 단위가 되는 과정.

천문학적 발견, 생물학적 발견을 통해

문명을 하나의 역사 연구 단위로 삼은

[총,균,쇠]의 다이아몬드와

[사피엔스] 시리즈의 하라리의 역사 서술을 언급하고 있다.

 

 

총평

저자 유시민은,

역사는 오롯이 있는 사실을 전하기 보다,

해석이 들어가고

서사가 반영될 수 밖에 없는 지적 산물이며,

그 관점을 통해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고 미래를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는 현대사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유시민은 역사를 있는 그대로의 역사, 기록의 역사로 남기려 했던

이 책 속의 '역사가'들에 대해서는 다소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유시민이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추구하는

역사가들에 대한 비판은,

사건과 현상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에 대한 일침이다.

 

당장 나만 봐도,

책이나, 온라인 미디어에 대해

곧이 곧대로,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라는 전제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나의 관점, 입장 없이 오롯이 나로 살아갈 수 있을까?
저자 유시민도 돌려말하고 있지만,
이 책은 역사와 역사를 적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빌어

각자의 관점, 입장이 없는 삶에 대한 비판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책의 말미에서도 밝혔듯이,

'역사의 역사'는 역사가와 역사서에 대한 유시민의 르포르타쥬이다.

가급적 각 역사가들과 관련된 당시 정황을 보도하듯 다루고,

그 뒤에 각각에 대한 유시민의 판단이

서사처럼 가미되어 덜 지루하다.

 

무비판적인 삶,

그저 강한것과 시류에 순응하는 삶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느리게 넘겨볼만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