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 : 각자의 황금기, 그 단상들.

2012. 7. 15. 16:46Reviews


Now, you are living with your Golden Age!



어른이 된다는 건, 

과거를 '추억'으로 포장하여,

그게 좋았던, 싫었던 

마음 속에 간직하는게 아닐까요?



보통의 한국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보편적인 시기는 언제일까요?


저에겐 개성이 말살되다시피 했던 군생활 2년.

스스로를 입시에 매몰시켰던 고등학교 3년 인데요. 

다시는 되돌아 가고싶지 않은 시기입니다.


30살이 된 지금, 

오히려 삶의 중심에 스스로가 있고,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할 수 있게 되어

지금이 매우 소중합니다.



영화 속, 길 펜더(오웬 윌슨)는 

헐리웃의 잘나가는 영화극작가입니다. 

하지만 그는 순수문학(소설)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헤밍웨이와 필츠제럴드가 살던 1920년의 파리는

늘 동경하며, 가고 싶어하는 황금시기(Golden Age) 입니다.


길은 그의 약혼녀 이네즈(레이첼 맥아담스)와

이네즈의 부모님의 파리 출장길에  동행하게 되는데요.

파리를 동경하던 길과 달리

이네즈에게 파리는

따분한 '박물관' 이랄까요?


이네즈에게 파리는

베르사이(베르사유)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피카소의 그림 등 

소위 교양을 쌓기 위해 들러가는

박물관과 같은 old-fashioned city일 뿐이죠.


이네즈의 아버지 또한, 

프랑스 기업을 M&A하기 위해 파리에 들렀을 뿐,

미국과 외교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프랑스에 있다는걸

그리 달가워 하지 않습니다.

이네즈의 어머니도

파리는 그저 쇼핑을 위한 곳일 따름입니다.


영화에서 길은

그가 동경하는 순수 문학의 도시 안에서

세속적인 사람들에 둘러쌓여 있습니다.



2000년대 현대의 파리의 자정에 종이 울리면

1920년대 파리 시내를 달리던 푸조 리무진이 등장합니다. 

길은 그 리무진을 타고

1920년대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리무진이 데려다 준 첫 파티에서 

'위대한 갯츠비'의 작가 스캇 피츠제럴드와 

그의 부인 젤다 세이어를 만납니다.

(피츠제럴드 역을 맡은 배우는,

이제는 널리 알려진 톰 히들턴이네요.)


파티에 실증을 느낀 피츠제럴드 부부를 따라간 펍에서는 

헤밍웨이를 만나기도 하죠.

그리고 허밍웨이를 통해 

유명한 당대의 평론가 거트 루드 스타인에게 

자신의 첫 소설의 평론을 맡길 

행운까지 얻게 됩니다.


<영화 속 피츠제럴드 부부를 연기한 배우, 실제 피츠제럴드 부부)>

 

첫 시간여행의 설레임, 

길은 1920년대 파리의 매력, 

자신이 동경하던 그 때, 그 사람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0년대 피카소의 연인이여던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게되죠. 


1920년대 파리에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 또한 

2000년대 길이 1920년대의 파리를 동경했듯이

고갱이 살던 그 1890년의 파리를 동경하고 있습니다.


(중략...)


살바도르 달리를 연기한 애드리언 브로디, 

거트 루드 스타인 역의 캐이시 베이츠 등 

멋진 배우들이 등장합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영화를 직접 보시길 권합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현재, 1920년대, 1890년대 파리 거리,

배경 음악을 부족한 필력으로 전달하기 어렵네요.



1. 지금이 당신의 최고의 순간입니다.

길은 황금시기인 1920년으로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고,

현재의 이네즈와 작별을 고하죠.


하지만,

그녀 나름의 황금시기(1890년대)를 갖고 있던 아드리아나와 시간여행하면서,

아드리아나는 길과 이별하며 1890년대에 남길 원하죠.

길 자신의 황금시기인 1920년대 파리로 돌아가자고 설득하는건,

반대로, 황금시기를 동경하는 자신에게,

원래의 그곳으로 돌아가자고 설득하는 것이죠.

길은 자신의 황금시기에 남은 아드리아나와 달리,

스스로의 '지금'인 2010년 파리로 돌아옵니다.


이 부분에서

'과거에 대한 향수'를 안고 살아갈 것인가?

현실을 받아들이고,

지금을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해봤습니다.




2. 안정된 공간과 역동성이 흐르는 공간. 

그 공간을 흐르는 진실한 말과 글



영화 중 헤밍웨이를 보며, 

왜 우리 시대에 헤밍웨이와 같은 작가가 

등장하기 어려울까란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제 청소년기 청년기에는 박경리 작가님,

박완서 작가님처럼 저에게 더 고귀한 작가가 존재합니다.)


영화 속 헤밍웨이는


'글은 솔직해야한다. 

정직한 글, 꾸밈없는 글은 

누구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다.'


라고 합니다.


그 정직과 꾸밈없음은 무엇일까요? 

경험과 사색 속에서 묻어나는 글이겠죠?

실제 헤밍웨이는 스페인 내전과 아프리카 탐험

그리고 휴양지(노인과 바다의 배경과 비슷하죠?) 등을 돌며

그의 삶을 작품에 담아왔습니다.


2000년대 '귀여니'라는 정체불명의 웹작가가 등장했죠. 

그 글들을 직접 읽진 않았지만, 

읽을 가치가 있을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토지를 쓰기 위해

소설 속, 산청과 지리산 일대를 조사하며

공간에 대한 자료와 말을 수집하고 공부했던 박경리 작가와,

인스턴트처럼 자극적인 단어의 귀여니 글을 

어떻게 같은 반열에 둘 수 있을까요?


그렇듯, 

헤밍웨이의 경험이 묻어난 그의 글은 

그의 삶 자체입니다. 

(동란의 경험의 묻어나는 박완서님의 글처럼.)


우리 시대 이슈는 많습니다.

하지만 삶과 죽음이 교차하거나

전쟁같은 치열함이 일상에 묻어나기란 쉽지 않는 시대입니다.

적어도 제가 살아가고 있는 동아시아와

그나마 해외여행으로 찾아갈 수 있는

유럽, 아메리카와 같이

문명이 발달한 곳에서 직접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이 지역들은 삶의 무게보다

가상의 도피처와 더 닿아 있는 곳일 겁니다.


노동과 사회의 규모는 커졌지만, 

개개인은 그 속에서 파편화된 부분만을 담당할 뿐입니다.

코끼리의 코, 다리, 꼬리를 각자 만지고 있는

장님같다랄까요?


삶에 대한 모습도 그렇지 않나요?

오늘과 내일 돌아올 휴일에만 매몰되어 있지 않나요? 

삶 전체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의 계기가 제거 된 현재에 살고 있지 않나요?


영화의 말미에 이르자, 

값진 경험보다 

돈을 위한 커리어(진심이 사라지 피상적 경험)만이 남은 

현실을 되돌아 보게 됐습니다.


영화 곳곳에 

파리의 밤과 낮, 명소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우디앨런 감독의 이전 작품에서 비춰 보건데,

자신의 황금시대와 

현재의 파리를 향해 걷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

환상이 아닌 현실의 모습을, 

현실의 삶을 만들어가는 

길의 선택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배경 공간보다 인물에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1890년대, 1920년대, 2010년대 모두 

카메라 앵글은 인물에게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결국 시공간의 의미를 만드는 건,

그 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걸

표현하려는 건 아니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