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홀로 영국, 두 번째.

2009. 4. 28. 18:16Diary

마음이 너무 아프고 쓰라려서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별을 잊기위해 만나던 사람에게는 너무 미안했지만,

그보다 나 자신을 속이는 것은 더 큰 마음의 짐이 될 것만 같았다.


지난 밤엔 광운대 링크에서 광운대 동아리와 경기를 갖었다.
무거운 장비로 온 몸을 덮고서 2시간동안 빙상과 벤치를 오갔던 것이 무리였을 텐데도,
아침 일찍부터 짐을 다시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브리스톨에 있는 친구녀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 필요한거 없어? 거기서 비싸고 여기선 싼거...

집에서 택배로 부쳐줘서 그렇게 필요한 건 없어.

거긴 펜 하나도 왠만한건 4, 5파운드는 줘야하니까 색깔별로, 하이테크 펜으로 부탁하는 친구

그래, 공항 가는 길에 사갈 수 있으면 사갈께.

다시금 공항가는 길을 확인했다.
공항버스를 타기에는 조금 걸어야하고,
그렇다고 공항전철을 타려면 지금 바로 나가야하는데, 그럼 지금 가야지.

밤새 내 체온으로 데워진 공기를 빼내듯,
어두운 방문을 열었다.

잠깐만 다녀올께.

밖은 청명한 늦겨울의 날씨다.
그래도 아직 겨울의 차가운 기운은 오전 9시가 넘어도 가득했다.
자취방이 있는 주택가 담넘어로 나목의 앙상한 가지도
아직은 꽃피울 때가 아닌지는 알고 있나보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으로 밑창에 플라스틱이 깨진 신발의 삐그덕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이어폰을 깊게 꽂고 있었지만, 오른발을 내딛을 때마다 들리는 그 소리가 귀속으로 파고들었다.
지난 봄비가 내리던 날 그 사람과 같이 샀던 신발.
같이 신고서 운동하자던 약속을 했던 신발이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그 속은 깨지고 삐그덕 소리가 나고 있다.
평소 같으면 바꿀 법도 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것은 비록 돈으로는 돌려주었지만, 그 사람이 사준 신발이니까.
가방을 어깨에 매고, 무거운 여행가방을 끌로서 마을 버스에 오르는 것이 오늘 따라 너무 버겁다.



딱 저녁을 먹을 시간인데,
오늘은 광화문 대형 서점에서 만나 곧바로 맥주를 마시러 갔다.
감정이 좀 격해질 때가지 싸우고서, 파키스탄 출장을 다녀오고서 꼭 2주만에야 그 사람을 만났다.

출장은? 거기 테러나고 위험해서 걱정 많이 했는데.


카라치에서 이슬라마바드 갈때랑 이슬라마바드에서 거기 대사관 갈 때만 조금 위험했어.

요즘 몸이 좋지 않아서 맥주로도 취기가 쉽게 올라왔다.

나갈까?


그래, 내가 계산할께.

카드를 꺼내 계산할 때까지도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땅에 고개를 떨구고 있다. 작은 키에 머리숱이 몇 가득 삐져나온 묶음 머리에 오늘도 힘들었겠구나 싶다. 호프집을 나와 종각역으로 걸었다.

할 말있어?



그럼 저기 잠깐 앉을까?

오후에 내리던 비에 종각역 밖의 돌도 물기에 젖어 있었다.

잠깐만 좀 닦자.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닦아도 빗물이 전부 닦아내기는 쉽지 않았다.

됐어. 그냥 서서 얘기해.


그래, 응 무슨 말?


헤어지자.

그 사람이 출장간 사이에 나도 곰곰히 생각했던 말이다. 차가운 그 사람과 미래를 함께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것은 몇 개월 됐었다. 그리고 사실 오늘 여기에 오면서도 뭔가 예감하고 있었던 말이다.


너한테는 기댈 수가 없어. 넌 아직 어려.


아직 내가 학생이니까, 곧 취직하고 그러면 돈도 벌고 누나한테 더 잘해줄 수 있어.


우린 안맞는거 같애.


좀 더 생각해봐.


아냐, 아무리 생각해도 우린 아닌거 같애.

고개를 바닥에 떨군 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게 보였다. 어두운 가로등 빛에 그 사람의 검은색 코트위로 떨어지는 눈물이 비췄다. 그 사람을 바싹 안았다. 눈물이 나고 내 가슴도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서 입을 맞췄다. 평소 같으면 회사 근처라고 그렇게 안는 것도 뿌리치던 사람이, 주위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서 내 품안에서 조용히 있었다.

그러지말고 더 생각해봐. 응?


안 바껴.


너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우리 관계가 끝나는 건 아니잖아. 집에 가자.


아냐, 혼자 갈께. 오늘은 그냥 혼자 갈께.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끝이 왔구나 싶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대학 캠퍼스 안에 문구점에 들러 친구와 그 사람에게 전해줄 문구류를 샀다.

먼지 가득한 공기가 햇빛을 가리고 있다. 그 사이를 뚫고 전철을 타고, 다음 정거장에서 공항철도로 갈아타고,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주머니 안 지갑에는, 그 사람 대신 서류를 보냈던, 옥스퍼드 리나커 칼리지 주소 몇 줄 적힌 메모지 한 장이 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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