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소비에 매몰된 삶

2012. 9. 26. 02:26Diary

이전 같은 '직장'을 얻기위해 고군분투했었던 사람들과의 모임이 오늘 있었다.

당시 그 '직장' 생활을 한 사람은 나 뿐이였고, 나 마저도 지난해 6월에 20개월을 채우고 그만 뒀었더랬다.


애초 모임의 목적인 다음주 결혼을 하는 이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각자 자기 '직장'에서의 에피소드와 자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서 인정하는 기준으로서의 직장을 갖지 않은 나로서는

'직장' 이야기에 말을 섞는다는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였다.


직장 생활의 스트레스, 성과금 등 돈에 대한 스트레스 등등...

각자의 상황에 따라 스트레스는 달랐지만,

그 스트레스를 푸는 방식은 대부분 소비였다.


돈은 왜 벌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왜 스트레스를 받을까?

돈을 벌다보니까?

그럼 스트레스를 풀고 남은 돈을 벌기 위해 직장 생활을 하는건가?

스트레스는 다 풀리긴 하는걸까?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소비 활동이 건강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스트레스로부터 자기 자신을 치유하고 있는걸까?


나도 급히 직장생활을 시작 했었다.

하지만 그걸 '직장생활'이라고 하는 순간, '회사원'이라는 생각이 들 때만큼 끔찍한 적이 없었다.

미천하지만 내게는 추상적으로는 꿈, 현실적으로는 목표가 있었고,  

그게 일종의 '서비스를 디자인한다.'는 행위로 정의 할 수 있었다.


첫 직장의 시작은 그 꿈과 목표로 다가가는 '직업'과 맡 닿아 있었지만,

이후 20개월의 직장생활 동안 그 '직업'에 대한 꿈과 목표는 고사되고 있었다.

오히려 다달이 들어오는 월급을 뽑아 쓰며, '이 정도는 해줘도 돼!'를 되뇌이며 현실과 타협했던 순간이 잦았다.


돈을 벌다 벌지 않으려니 스트레스를 받을 밖에.

처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서는, 집안에 흔들의자에 기대어 졸다가도 갑자기 깨기 일 수 였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7월의 더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몸에 오한이 엄습했다.

도시에서 의존하지 않는 삶을 연장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바깥 출입도 자제했었다.

정신은 점차 어두운 나락으로 밀려들어가는 느낌이였다.

그렇게 불안을 안고 살았었다.


그 불안에서 서서히 극복하게 된 계기는,

한국의 정치 상황과 같은 바깥 세상에 대한 관심이였다.

내가 그런 소비를 위한 금전을 목적으로 삶을 살게 된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

그 때, 그 직장을 선택한게 내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런 개인의 선택안 밖에 제시해준 사회의 구조는 무엇인가?


한국 사회는 한 개인을 극히 자본의 문제로 몰아 넣는다.

비싼 교육비의 부담을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지게 만들고,

높은 집값으로 가정을 꾸리려는 청년들을 고되게 한다.

오르는 물가에 비해 생산성이 개선되지 않고, 급여도 그 만큼 오르지 않는다.

이런 문제 속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더 불안하게 받아들이고,

현재는 오직 그 불안한 미래를 위해 자산을 축적해야하는 강박증으로 몰아넣는다.

이성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쓰는게 아니라,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더 자주 동원된다.

감성은 아련함 속으로 파뭍히고 그 빈자리는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그런 현재를 많은 부분 술과 온갖 소비활동에 기대어 풀어내려고 한다.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잃은 건 '월급'이다.

하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내가 얻은 것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과 '나를 위한 시간'

그리고 '직장'같은 조건이 없어도 내 상황과 감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다.


난 자본에 혈안이 된 프렌차이즈 빵집보다 주인과 이야기할 수 있는 동네 빵집에 다닌다.

알바와 신용카드를 주고 받고 끝인 프렌차이즈 커피판매점보다 주인 아저씨가 볶고, 권하는 동네 커피를 더 즐겨마신다.

때로는 직접 담근 김치와 홍합 미역국을 대접해주는 이태리 식당 친구분들은,

자취하는 내게 음식의 정을 떠올려주는 소중한 친구들이다.


이 모든걸, 돈으로 사려 한다면, 사람은 없고 단지 거래만이 남는다.

하지만, '거래하려' 하지 않고, 이야기하고 이해하려 한다면, 그건 친구 사이에 나누는 값진 무언가,

잘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값진 삶의 가치가 남는다.


적어도 여행에 있어서 만큼은,

20만원 주고 넉넉한 호텔방에서 하루를 자면서도 숙박비 걱정을 하기보다,

하루 만 오천원 하는 게스트 하우스 2층 침대에서 싸구려 한국 초코파이를 나누면서도 서로 신기해하는 친구를 사귀는게 더 가치 있고 마음 편한 여행을 선택했다.(그 친구들은 이따금 페이스북을 통해 근황을 묻는 Global Table 멤버가 됐다.)


지금은,

통장에 있는 돈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막연한 불안이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많은 돈이 있었음에도 업무 스트레스와 홀로 꾸려가는 도시생활에 밀려오는 외로움에 

자살생각을 더 자주했던 그 '직장생활'에 비견할 바는 못된다.


난 그 때보다 물질적으로 '덜 가졌지만',

날 이해해주고 같이 마주앉아 밥을 먹으며 허심탄회 이야기할 수 있는 더 깊은 친구들을 많이 가지게 됐다.

내일 내가 죽는다면, 내가 모아놓은 물질은 '아무것'도 아니다.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지금 행복할 일을 찾는게, 살아 있는 내가 갖는 '지상 최대의 과제' 아닐까?

단지, 지금을 즐기기 위해, 막연하게 불안한 미래를 위해 돈을 벌고, 현재를 위로하기 위해 소비하는 그런 삶은

내가 가까이 하고 싶은 그런 유형의 삶은 아니다.